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0년 작품 ‘테넷(TENET)’은 시간의 역행이라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밀도 SF 액션 영화입니다. 놀란 감독 특유의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와 논리적인 구성, 철학적 질문이 응축된 이 작품은 개봉 당시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습니다. 단순한 시간여행을 넘어서, 시간의 흐름 자체를 뒤집는 개념을 스릴 넘치는 첩보 액션에 접목시키며, 장르의 한계를 또 한 번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테넷’은 처음 보는 순간에는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반복해서 감상할수록 정교한 설계와 인과관계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단순한 재미보다는, 관객이 사고하고 퍼즐을 맞추는 체험 자체에 가치를 두고 설계된 작품입니다.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시간과 공간을 비틀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던 놀란 감독의 연출력이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며,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인버전(Inversion), 시간의 개념을 전복시키다
‘테넷’의 핵심 개념은 바로 ‘인버전’입니다. 이 인버전은 단순한 시간 여행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존재나 물체를 의미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탄환이 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총으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묘사되며, 이 개념은 전투, 탈출, 추격 등 모든 액션 장면에서 독창적인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관객은 한 장면을 순행과 역행으로 두 번 보게 되며, 그 안에 숨겨진 진실과 인과를 차츰 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의 이중 구조는 단순한 설정을 넘어, 인물의 감정과 선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미래의 행동에 의해 과거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것이 곧 필연적인 결정이 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우로보로스’처럼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구조는 영화의 철학적 테마를 대변하며, 인간이 시간 속에서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인물 관계와 존재의 불확실성
영화는 이름조차 없는 ‘주인공(The Protagonist)’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의 여정은 단순한 임무 수행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탐색으로 이어집니다. 주인공은 테넷이라는 비밀조직을 통해 세계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저지하려고 하며, 그 과정에서 닐, 캣, 안드레이 사토르 같은 인물들과 얽히게 됩니다. 각 인물은 시간 속 다른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관계는 명확한 것 같으면서도 끝없이 변화합니다.
특히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닐은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그 정체가 명확히 드러나며,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가 주인공과 과거에 맺었던 관계는 현재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선형적 시간의 환상’을 완전히 해체하는 구조로 작동합니다. 닐과 주인공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가장 감정적인 지점을 형성하며, 놀란이 시간의 틀 안에서 관계를 어떻게 설계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시공간을 압도하는 기술적 완성도
‘테넷’은 놀란 영화답게 대규모 실사 촬영과 복잡한 스턴트, 정교한 편집, 그리고 루드비그 고란손이 만든 전자음 중심의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트랙이 결합되어 탄생한 작품입니다. 특히 영화 속 공항 충돌 장면, 역행과 순행이 동시에 벌어지는 ‘타임 배틀’, 그리고 고속도로 추격 시퀀스는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연출력으로 완성되어 관객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는 CG가 아닌 실제 촬영을 중시하는 놀란 감독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놀란은 IMAX 카메라와 70mm 필름을 활용해 압도적인 화질과 프레임 구성을 보여주며, 특히 시간의 흐름이 뒤바뀌는 장면에서도 시각적으로 혼란스럽지 않게 설계함으로써 관객이 정보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물리 법칙을 기반으로 설정한 시간 개념 덕분에 관객은 영화 속 모든 설정을 단지 ‘환상’으로 느끼지 않고, 실재할 수 있는 과학적 아이디어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는 영화의 세계관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요인이 되며, 몰입도를 극대화합니다.
‘테넷’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비교 대상은 놀란의 또 다른 대표작인 ‘인셉션’입니다. ‘인셉션’이 꿈속 세계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한 개인의 무의식을 탐험하는 구조라면, ‘테넷’은 시간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서를 해체하고, 개인과 세계의 관계를 재정의합니다. 두 영화 모두 액션 스릴러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철학과 구조적 실험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테넷’은 훨씬 더 구조적이고 개념적입니다. 인셉션은 감정적으로 관객이 공감할 여지가 많은 반면, 테넷은 냉정하고 거리감 있는 전개로 인해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 영화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관객의 호불호를 갈라놓지만, 한편으로는 놀란 감독의 영화가 감상보다는 해석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테넷’은 관객에게 사고할 여지를 남기는 영화로, 여러 번 감상하며 의미를 되새기는 여운을 지닌 작품입니다.
‘테넷’은 단지 영화 그 자체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매개로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재해석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체험입니다. 놀란 감독은 일관되게 시간에 대한 집착을 보여왔고, 이번 작품에서 그는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전복적인 개념을 스릴러, 액션, 철학이라는 세 가지 층위로 완성해 냈습니다. 영화는 익숙한 현실과 완전히 낯선 물리 법칙이 공존하는 세계를 구축하며, 관객에게 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전환시킬 기회를 제공합니다.
‘테넷’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인간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동시에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단지 SF 장르의 경계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시간이라는 주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유도한 작품입니다. 반복해서 감상할 때마다 새로운 구조와 의미가 드러나는 ‘테넷’은, 한 편의 영화이자 수학적, 철학적 퍼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