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The King’s Man)’는 기존 ‘킹스맨’ 시리즈의 화려한 액션과 유쾌한 분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조직의 기원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프리퀄입니다. 2021년 개봉한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을 제1차 세계대전 직전으로 설정하고, 스파이 조직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익숙했던 킹스맨의 슈트, 갤러해드 코드, 기발한 무기 대신, 이번 작품은 역사적 현실과 정치적 음모, 인간적 고뇌에 무게를 둔 정통 사극의 형식을 취합니다.
매튜 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역사의 이면에 숨은 음모를 스파이 장르로 포장하면서도, 시리즈 특유의 스타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실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을 허구와 엮어내며,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구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액션 오락물이 아니라, 비밀 조직의 철학과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깊이 있는 전개로 이어집니다.
옥스포드 공작과 조직의 태동
영화의 주인공은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옥스포드 공작 오를란도입니다. 그는 평화를 신념으로 삼는 귀족이자,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인물입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피하고자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혼란으로 치닫고, 결국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옥스포드 공작은 단순한 신사나 첩보원이 아니라, 이상주의와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도자로 그려집니다.
그가 설립하게 되는 비밀조직 ‘킹스맨’은 단지 정부의 하수인이 아니라, 권력의 균형을 위해 중립적 개입을 감행하는 자발적 행위자입니다. 이 조직은 귀족 출신의 엘리트와 하층민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이 함께하며,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는 협력과 신념의 연대가 바탕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기존 시리즈보다 훨씬 현실에 뿌리를 둔 서사 구조를 지니며, 캐릭터들의 심리와 선택에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현실과 교차하는 음모의 퍼즐
이번 영화의 흥미로운 구성은 실제 역사와 픽션을 정교하게 결합한 데 있습니다. 영화에는 러시아의 그레고리 라스푸틴, 영국의 윈스턴 처칠,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등 실존 인물이 등장하며, 그들의 정치적 선택과 암살, 배신이 전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구조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양털 뺏는 자들(The Flock)'이라는 음모 집단이 존재합니다.
이 집단은 전 세계 지도자들을 조종하며 자신들의 세계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비밀 결사로, 킹스맨의 탄생 배경에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단순히 배경이 아닌, 극의 중심으로 작용하면서 극의 긴장감은 배가되고, 시청자는 스파이 영화의 매력뿐 아니라 대체 역사 장르의 묘미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영화는 단순한 상상력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한 해석을 통해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 도전합니다.
시대극으로 구현된 전투와 희생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액션의 스타일이 확연히 다릅니다. 기존 킹스맨 영화가 과장된 무술, 슬로 모션, 경쾌한 음악과 함께 펼쳐졌다면, 이번 영화는 전쟁터의 참상과 고전 무술의 리얼함을 강조합니다. 특히 중반부에 펼쳐지는 전장 장면은 유혈과 폭발보다 인물의 심리와 희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또한 라스푸틴과의 대결 장면은 본 시리즈의 유머와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절묘하게 살아있는 대표적 시퀀스입니다. 고전 무용과 동양 무술이 결합된 액션은 기존 스파이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새로운 시도였고, 캐릭터의 괴이함과 위협을 동시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액션 구성은 단순한 오락성을 넘어서, 시대극 속 인물들의 신념과 고통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전체 영화의 무게감을 지탱합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심축은 옥스포드 공작과 그의 아들 콘래드의 관계입니다. 콘래드는 아버지와 달리 세상의 부조리에 직접 뛰어들고자 하는 인물로, 그의 이상과 의지는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변화를 이끕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단순한 세대 차이 그 이상이며,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충돌, 이상과 책임 사이의 균형을 상징합니다.
콘래드가 택한 선택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영화의 비극적 색채를 강화하며, 공작이 '평화를 위한 행동'이라는 철학을 실천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갈등과 희생, 그리고 존중과 계승으로 완성되며, ‘킹스맨’이라는 이름이 단지 조직이 아니라 ‘가치의 집합’ 임을 상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시리즈 전체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시리즈의 기원을 다루는 프리퀄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영화로서의 완성도 또한 높습니다.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개인의 상실, 국가 간의 음모, 사회 구조의 변화 등을 정교하게 엮으며, 단순한 액션 영화에서 벗어나 한 편의 정치 드라마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유쾌함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의외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시리즈의 서사적 깊이를 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작품은 또한 이후 나올 시리즈나 외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킹스맨 유니버스의 방향성과 철학을 정립하는 데 기여합니다. 매튜 본 감독은 시리즈의 세계관을 단순한 현대판 스파이 유머로 한정 짓지 않고, 다양한 시대와 스타일 속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그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어질지는 이후 후속작에 달려 있지만, 이번 작품은 그 첫걸음으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