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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 : 원인, 주요 사건, 종결

by think7402 2025. 4. 24.

 

 

15세기 중후반, 영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으로 알려진 이 내전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약 30년간 이어졌으며, 영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권력 투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전쟁의 명칭은 싸움의 중심에 있던 두 귀족 가문, 랭커스터가(Lancaster)와 요크가(York)의 상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자는 붉은 장미, 후자는 흰 장미를 각각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단순한 귀족 가문 간의 대립을 넘어서서, 영국의 정치 체계, 사회 구조, 군사 제도, 왕실 정통성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은 지역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왕권은 반복되는 정권 교체로 인해 약화되었으며, 왕실과 의회의 관계도 심각한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귀족 간 동맹과 배신, 민중 봉기, 외세 개입 등이 반복되며 극심한 혼란의 시대를 연출했고, 그 결과 잉글랜드는 중세의 봉건 질서에서 근세 국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새로운 왕조인 튜더 왕조의 등장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 정치사의 중대한 분기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다음은 장미 전쟁의 주요 원인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역사적 변화에 대해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글입니다.

 

장미 전쟁의 원인

장미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복잡한 혈통 문제였습니다. 플랜태저넷 왕조를 세운 에드워드 3세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두 번째 아들 라이오넬의 후손들이 요크가를 이루었고, 세 번째 아들 존 오브 곤트의 후손이 랭커스터가를 형성했습니다. 이로 인해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 간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경쟁이 촉발되었고, 이 갈등은 곧 무력 충돌로 확대되었습니다.

문제는 헨리 6세의 통치 시기에 본격화되었습니다. 헨리 6세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정치적 결단력도 부족했습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유능한 섭정들과 대신들의 보좌를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귀족 간 알력 다툼과 정치적 파벌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귀족 세력은 각자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무능함을 비판하며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고, 이는 곧 전국적인 내전으로 비화되었습니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요인도 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오랜 백년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고, 프랑스에서의 영토 상실은 국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귀족들은 군사 동원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지방민들을 압박했고, 이는 농민과 도시민의 불만을 자극했습니다. 민중은 각 가문의 권력 투쟁에 동원되면서 피폐해졌고, 전쟁은 단순한 귀족 간 분쟁을 넘어서 국민 전체의 고통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장미 전쟁은 정치·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로 나타난 내전이었습니다.

 

전쟁의 주요 사건

장미 전쟁은 30년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들이 이어지며 진행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요크가가 주도권을 잡으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455년 제1차 세인트앨번스 전투는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세력을 처음으로 무너뜨린 전투였으며, 사실상 장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후 1461년 토우턴 전투에서 요크가는 대승을 거두며 랭커스터가를 압도했습니다. 이 전투는 약 5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전투로, 영국 내전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4세는 요크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며, 요크가는 정치적으로도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전쟁 중에도 상공업 진흥 정책을 펴고, 상비군 개편과 조세 개혁을 추진하는 등 왕실 권력 강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다시 역전됩니다. 헨리 6세의 왕비 마거릿은 적극적인 외교 전략으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지원을 확보하였고, 1470년 헨리 6세는 일시적으로 복위에 성공합니다. 랭커스터가는 귀족들의 재결합과 외교 동맹을 기반으로 세력을 회복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요크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랭커스터가는 다시 궤멸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헨리 6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세자가 전사했고, 헨리 6세도 곧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왕조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크 왕조 내부의 분열은 새로운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에드워드 4세 사망 이후 왕위에 오른 리처드 3세는 조카들을 의문스러운 방식으로 제거하며 권좌에 올랐고, 이에 대한 민심 이반이 확대되었습니다. 리처드 3세의 통치는 짧고 불안정했으며, 그의 권력 기반은 좁고 주변 귀족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불만과 혼란은 헨리 튜더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특히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꺾고 승리함으로써 요크 왕조의 몰락과 함께 장미 전쟁은 종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장미 전쟁의 종결

보즈워스 전투(1485년)는 장미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로 기록됩니다. 이 전투에서 헨리 튜더는 프랑스의 지원과 내부 반란 세력의 협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리처드 3세는 전사함으로써 요크 왕조는 무너졌습니다. 이후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며 튜더 왕조를 수립하였고, 이후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두 가문의 화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헨리 7세는 왕권 강화를 통해 봉건 귀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는 상비군을 창설하고 왕실 재정을 확충하는 등 국가 권력의 중심을 왕실에 두었으며, 이를 통해 잦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사회 질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또한 의회를 통제하면서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왕실과 귀족, 시민계층 간의 새로운 균형점을 마련하였고, 왕실 법정을 통해 귀족들의 자의적인 사법권 남용을 제약했습니다.

장미 전쟁은 이처럼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통합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되었고, 이후 영국은 한동안 평화와 안정의 시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튜더 왕조의 시작은 단순한 권력 교체를 넘어, 영국 정치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왕실과 귀족 간의 관계, 왕위 계승의 안정화, 왕실의 행정력 강화 등은 모두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구조화되었고, 이는 영국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후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로 이어지는 통치는 튜더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며, 영국의 국가 정체성과 근대 정치문화의 토대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장미 전쟁은 단순한 왕위 쟁탈전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권력의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 리더십의 중요성과 민심의 흐름, 그리고 국가 체계의 구조적 개편이라는 다양한 요소가 한 데 모여 형성된 역사적 과정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이 전쟁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에서 재조명되며, 현대 영국인들에게도 역사적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또한 국제 정치사 측면에서도 ‘왕조 전쟁’이라는 개념의 전형적 사례로 분석되며, 왕위 계승의 명분과 현실 정치의 대립, 외교와 전쟁의 상호작용, 민심의 중요성에 대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이처럼 장미 전쟁은 과거에 일어난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분기점이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