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철학자는 인생을 비관했는가?
우리는 대부분 더 나은 삶,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 희망, 성취와 같은 단어들이 우리 일상의 화두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사에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삶을 바라본 철학자들도 존재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입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고통과 결핍의 연속으로 바라보며, 삶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존재 자체의 고통스러움에 주목했습니다. 이처럼 삶에 대한 비관적 관점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한 그를 두고, 많은 이들은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염세주의란 단순한 우울함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고통과 결핍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삶의 본질을 사유하려는 철학적 태도입니다.
이 글에서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염세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사상이 어떤 철학적 구조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그의 사상이 현대인의 불안과 번아웃, 과잉된 욕망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지도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염세주의의 철학적 구조: 의지(Wille)와 고통의 세계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은 철학자 칸트에게서 영향을 받은 ‘현상과 본체’의 구분입니다. 그는 이 세계를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실체’로 나누었습니다. 칸트는 이 실체를 '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는데,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물자체의 정체를 **‘의지(Wille)’**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의지는 이성이나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힘으로, 단지 존재하려는 힘, 욕망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물론이고 자연 전체가 이 의지의 지배를 받으며, 생명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추구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염세주의의 핵심이 시작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은 충족되기 전에는 고통이고, 충족된 후에는 권태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지만,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으면 괴롭고, 채워져도 곧 지루해지며, 또다시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결국 삶은 만족 없는 추구의 반복, 즉 고통과 결핍의 순환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고통은 단지 개인적인 심리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뿌리 박힌 구조적 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은 단지 성격 탓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의지’의 형상이라는 데서 비롯된 필연이라는 말입니다. 즉, 고통은 삶의 예외가 아니라 본질이며, 고통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핵심 사상입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단순한 절망이나 부정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직시하고 그 근원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고 사유할 가치가 있습니다.
고통의 해석 : 삶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의 역할
그렇다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고통스럽고 결핍된 세계 속에서 단지 체념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철학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모색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의 구원론적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술을 제시합니다. 그는 음악, 문학, 미술 등 예술을 통해 인간이 일시적으로나마 ‘의지’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술은 우리의 욕망을 잠시 멈추게 하고, 고통을 잊게 해주는 심미적 해방의 공간입니다.
특히 그는 음악을 가장 순수한 예술로 여겼습니다. 음악은 구체적인 이미지 없이도 의지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게 해주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의지의 부정이자 위로의 수단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그는 **연민(compassion)**과 도덕적 자각을 또 다른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모든 존재가 고통받는 동일한 운명을 지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연민의 감정을 윤리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이는 훗날 니체나 불교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셋째, 그는 의지를 철저히 거부하는 삶의 태도, 즉 금욕과 고요함 속에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이는 불교의 ‘해탈’ 개념과 유사하게, 욕망에서 벗어나 존재의 고통을 초월하려는 철학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단순히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덜 괴롭고,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사유한 철학입니다.
현대 사회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오늘날 우리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 번아웃, 우울, 공허감 같은 정서적 문제들이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보와 자극이 넘쳐나고,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음에도 삶은 왜 이토록 피곤하고 불만족스러울까요?
바로 여기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다시 조명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19세기 초에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충족되었어도 다시 새로운 결핍을 낳는 구조 자체가 문제라고 통찰했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이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새 스마트폰,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팔로워를 향한 끝없는 욕망은 결국 또 다른 공허로 이어지며, 이는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이 고통의 원인을 명확히 짚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은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설령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곧 새로운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이는 현실의 우울을 조장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문제를 직시하고 본질을 이해하자는 철학적 제안입니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타인과의 비교에서 벗어나고, 순간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미니멀리즘’, ‘비우는 삶’, ‘자기 돌봄’과 같은 라이프스타일과도 통하는 부분입니다.
더불어 그는 모든 존재가 고통받는 운명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인식 속에서, 연민과 공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경쟁과 효율 중심의 사회 속에서, 이러한 인식은 인간관계와 공동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윤리적 전환점을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염세주의는 절망이 아니라 통찰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흔히 오해되곤 합니다. 단지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철학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삶을 포기하거나 외면하자는 말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더 깊고 조화로운 길을 모색하자는 철학적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욕망이 우리를 얼마나 지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었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예술, 명상, 연민, 자기 절제는 그의 철학이 말하는 구체적인 대안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세상이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속삭입니다. “괜찮다,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너를 결정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그 안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염세주의는 결국 절망을 넘은 자리에서 비로소 도달하는 통찰이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입니다.
그것은 차갑지만 따뜻하고, 냉정하지만 자비로운 시선으로, 우리에게 조용한 희망의 철학을 건넵니다.